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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38)_프린트물_2025년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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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3-04 10:09

본문

기독교강요강해(138)

[ 제3권 제20장 34항 – 제20장 39항 ]


       성경본문: 마태복음 6:9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0장 기도: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주기도문 : 처음 세 기원에 대한 해설, 34-43항)

34항.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이 된다

  이제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더욱 확실한 방법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기도의 양식 자체를 배워야 하는데, 하늘 아버지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들을 통해서 그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다(마6:9이하,눅11:2이하). 우리는 이 양식에 의해서 아버지의 무한한 인자하심과 관용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어린이들이 어려운 근심 걱정이 있을 때마다 부모의 보호 아래로 달려가 피난처를 얻는 것같이, 우리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찾으라고 경고하시며 역설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지를 - 우리의 빈곤이 얼마나 심한 것인지, 무엇을 구하는 것이 공정한지,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한지 등 충분한 인식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 아시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없는 능력을 자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보충해주셨습니다. 즉,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기도 양식을 정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기도해도 좋은 것과, 우리에게 유익한 것과, 우리가 구할 필요가 있는 것을 모두 한 도표에 적은 듯이 우리에게 제시하셨습니다. 이 친절하신 가르침에 의해서 우리는 큰 위안을 받게 됩니다. 곧, 우리가 구하는 것이 조금도 불합리하지 않으며, 조금도 이상하지 않으며, 조금도 부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안도감을 얻습니다. 우리는 거의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기술이 없는데다가 성취되면 도리어 자기들에게 해로울 일을 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고대 시인의 말을 빌어, 가장 훌륭한 기도라고 생각한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제우스 신이여, 우리가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를 상관하실 것 없이 가장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그리고 좋지 못한 일들을, 비록 우리가 원하더라도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명령하소서. ” 참으로 우리의 욕심대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대단히 위험한 짓이라고 판단될 만한 총명이 이 이교도에게도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우리 인간의 불행을 밝힙니다. 성령이 바른 기도 양식을 가르쳐주시지 않는다면(롬8:26)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입을 열 때에 반드시 위험한 일을 초래할 염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 양식을 성령으로부터 배운다는 이 특권을 우리는 더욱 존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친히 우리 입에 말씀을 주셔서 우리 마음에 일체의 주저와 동요가 없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35항. 구분과 중요한 내용

  이 기도의 모범 양식에는 여섯 가지 기원이 포함되었습니다. 일곱 제목으로 구분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찬성하지 않는 것은 복음서 기자가 반의 접속사를 사이에 넣은 의도는 두 부분을 결합하려는 데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치 “저희들이 유혹의 압박을 받게 버려 두실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무력한 우리를 도우셔서 넘어지지 않게 구해주옵소서”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고대 교회의 교부들도 우리와 의견이 같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일곱째 자리에 첨가된 것은 해석상으로는 여섯째 자리에 넣어야 합니다.


  이 기도는 그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중요시 하지만, 처음 세 기원은 특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점에만 유의하고 소위 우리 자신의 이익은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남은 세 기원은 우리 자신을 돌보는 일에 관련되며,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구해야 할 것에 대해 특히 배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할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배하는 것이 자유로운 마음에서 하는 일인지, 그렇지 않으면 보상을 기대하기 때문인지를 하나님께서 시험하려 하시므로, 우리는 이 기원을 드릴 때에 우리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목표로 삼아 이 한 가지 일에만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이 기원과 같은 부류의 다른 기원들에 관해서도 꼭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또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하는 대로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면 그 결과로 우리 자신도 거룩하게 성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이익에는 눈을 감아, 전혀 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사적 이익을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된 때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 세 가지 일을 여전히 원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와 바울이 한 일을 보면, 그들은 자기를 생각하거나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맹렬한 열의로 자기의 멸망을 갈망하는 것을 괴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멸망하는 것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출32:32,롬9:3).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할 때에도 우리 자신의 유익을 기원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특히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면 이 양식도 구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주기도문을 해석하기로 합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6항. “우리 아버지”

  우선 우리는 바로 우리가 전에 말한 사실에 봉착합니다. 즉 우리는 모든 기도를 다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며, 다른 이름으로 하는 기도는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놓는 것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사람이 누군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은혜의 자녀로 삼아주시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예를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참 아들이시지만 그 자신의 소원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제로 주셨는데 이는 우리를 양자로 삼으신 이 위대한 복을 우리가 확고한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양자로 삼으신 그 은혜에 의해 본래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것이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요1:12)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시고, 우리가 그를 대할 때에도 이렇게 부르기를 원하십니다. 이 한없이 다정한 이름으로 그는 우리 마음에서 모든 불신감을 없애려 하십니다. 아버지의 사랑 이상으로 더 큰 사랑은 아무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 대한 그의 무한한 사랑을 증명하시는 데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요일3:1) 부르는 것 이상 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사람의 선함과 자비를 초월하는 것과 같이, 그의 사랑도 육신의 부모의 사랑보다 더 위대하며 훌륭합니다. 따라서 땅에 있는 모든 아버지들이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잊으며 자기 자녀들을 버린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버리시지 않을 것입니다(시27:10,사63:16 참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딤후2:13). 우리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라는 약속을 받은 바 있습니다. 예언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낯선 사람이나 외국 사람에게 보호를 청하여 몸을 맡기려는 아들은 동시에 반드시 자기 아버지의 잔인한 처사나 빈곤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만일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 이외의 다른 데서 도움을 구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빈곤이나 수단의 결핍이나 잔인성과 지나치게 엄격함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37항. “우리 아버지”: 이 호칭 형식은 우리를 고무할 것이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비록 친절하시고 인자하시지만, 우리의 죄 때문에 매일 우리를 불쾌하게 생각하시게 되므로, 우리가 그를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일 인간 사회에서 어떤 아들이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을 때에, 변호인을 시켜서 자기 일을 호소하게 하며, 중재인을 시켜 화해하려고 하며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보다, 자기가 직접 아버지 앞에 나가서 겸손하게 탄원하는 태도로 죄를 고백하고 아버지의 자비를 간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한다면, 이런 때 그 아버지로서는 아들의 간청에 감동되지 않은 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비의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는(고후1:3 참조)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그 분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호소보다 직접 애원하는 자녀들의 눈물과 신음에 더욱 주목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직접 호소하라고 권고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아버지의 자비와 친절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공포심에서 행하는 일이며, 거기는 절망적인 심리의 흔적이 없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풍부하신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비유로 묘사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눅15:11-32). 어떤 아들의 마음이 아버지를 떠나, 그의 재산을 방탕한 생활에 낭비하고(13절), 모든 일에서 그에게 큰 죄를 지었다(18절). 그러나 아버지는 두 팔을 벌려 아들을 껴안고, 그가 용서를 빌기 전에 먼저 용서하며,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알아보고 기꺼이 달려가 맞이하며(20절) 위로하고, 다시 사랑받는 아들로 만듭니다(22-24절). 사람에게도 이렇게 큰 애정이 있다는 것을 보이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서 기대해야 할 사랑이 얼마나 더 풍부한가를 가르치십니다. 그는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모든 아버지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다정한 아버지이십니다. 문제는 은혜를 모르고 반역하며, 사악하고 완고한 우리가 그의 자비를 여전히 믿고 전적으로 그를 의지하는 데 달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해서 자신이 그러한 아버지라고 하는 확신을 더욱 강화시키시기 위해서 우리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분명하게 부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자녀들에 대해서 풍성하고 위대한 애정을 품으셨고, 언제든지 그들을 용서하시고자 하십니다. 이러하신 아버지를 가질 가치가 없는 저희들이지만 당신께서는 우리를 향해 아버지로서의 애정만을 품으신 것을 확신하며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의 자식들인 저희는 당신을 부르며 기도를 드리나이다.”


  그러나 우리의 좁은 마음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양자된 것을 보증하실 뿐 아니라, 이 일에 대한 증거로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큰 목소리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갈4:6,롬8:15). 그러므로 어떤 주저하는 생각이 우리 앞을 막을 때마다, 우리는 이 공포심을 바로잡아 주시기를 청하며,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그의 지도로 담대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해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38항. “우리 아버지” : 이 호칭 형식은 우리와 교우들과의 친교를 확립한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교훈은 각각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고 모두 공통적으로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들 사이에 큰 형제애가 있어야 한다는 경고를 줍니다. 왜냐하면 자비와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다는 꼭같은 권리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동등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한 아버지께서 우리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아버지가 되시며(마23:9), 우리가 얻는 좋은 것이 모두 그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당연히 우리를 서로 분리시키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며, 필요한 때에는 얼마든지 기꺼이 또 진심으로 서로 나누지 못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도움의 손을 뻗치기를 원한다면, 이 합당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형제들에게 가장 큰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은 가장 훌륭하신 아버지의 보호가 그들 위에 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들을 총애하신다면 다른 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 아버지께 대한 우리의 의무입니다. 인간사회에서 한 가족의 아버지를 진정으로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동시에 그의 가족 전체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백성과 가족과 그리고 그의 기업에 대해서까지도 아버지께 대한 것과 꼭같은 열성과 애정을 품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존중하셔서 독생자의 충만(엡1:23)이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즉 현재 눈에 보이며 그렇게 인정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을 기도 중에 기억해야 한다는 법칙과 일치해야 합니다.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정하셨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잘 되기를 원하며 바라는 것이 인정을 받을 일일 뿐 아니라 경건한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보다 믿음의 가족 곧 바울이 모든 일에 있어서 특히 우리에게 부탁한 사람들에 대해서(갈6:10) 특별한 애정을 품는 것이 마땅합니다. 요약하면, 우리의 모든 기도는 우리 주께서 그의 나라와 그의 가족 사이에 이루어 놓으신 공동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39항. 기도와 자선을 비교함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나 어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때에도 우리의 마음이 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으려 하거나 피하려 하지 말고, 모든 일을 거기에 관련시키라는 뜻입니다. 이런 기도는 각각 개인적으로 드리지만 그 기도가 이 목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그것은 공통된 기도입니다. 다른 일과 비교하면 이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일반적인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알고 또 보기에 가난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사람이 이 명령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모두 알 수도 없고 모두 구제할 수도 없으므로 고통받는 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을 빠뜨리게 됩니다. 그와 같이, 교회라는 공동 사회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특수한 기도를 드릴 때 즉 하나님께서 잘 알려 주신 사람들의 곤란이나 자기 일을 위해서 구체적인 기도를 드릴 때,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와 자신은 모든 점에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아낌없이 주는 일은 궁핍한 것이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한 도움은 아무리 먼 곳에 있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라도 줄 수 있습니다. 이런 도움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포함한, 따라서 저들도 포함한, 일반적인 기도 양식을 통해서 줄 수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바울이 그 당시 신자들에 대해서, 다툼 없이 어디서나 깨끗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역설한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딤전2:8). 바울이 다툼은 기도의 문을 닫는다고 경고한 것은 신자들이 서로 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를 드리라는 뜻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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