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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41)_프린트물_2025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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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6-24 08:53

본문

기독교강요강해(141)

[ 제3권 제20장 46항 – 제20장 50항 ]


       성경본문: 마태복음 6:13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0장 기도: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46항. 여섯째 기원

  여섯째 기원은(마6:13),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율법을 우리 마음에 새기시겠다고 하신 약속에 대응하는 것입니다(잠3:3,고후3:3).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반드시 끊임없는 싸움과 어렵고 괴로운 투쟁이 따르기 때문에, 이 기원에서 우리는 승리를 얻는데 필요한 무장을 갖추며 보호를 받기를 추구합니다. 이 기원에서 우리가 받는 지시는, 성령의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도움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는 우리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우리를 굽히시며 지도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성령의 도움은 사탄의 모든 전술과 모든 맹공에 대해서 우리가 절대로 굴복하지 않게 만드시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그런데 시험의 모양은 참으로 각양 각색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악한 생각은 시험입니다. 우리의 육욕이나 사탄의 선동으로 우리의 생각이 율법을 범하려 할 때 그것은 시험입니다. 또한 그 자체로서는 악하지 않은 것들도 마귀의 간계에 의해서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는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날 때에, 시험이 됩니다(약1:2,14,마4:1,3,살전3:5 참조). 이런 유혹들은 좌우에서 오는데, 바른편에서 오는 것은, 예컨대 재물, 권세, 명예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보기에 찬란하고 좋은 듯해서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하며, 그 감언 이설로 마음을 미혹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간계에 걸리고 그 감미로움에 취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왼쪽으로부터 오는 유혹들은, 예컨대 빈곤, 치욕, 경멸, 고난 등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곤란을 당하여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절망 상태에 빠져 확신과 소망을 버리고, 드디어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멀어집니다.


  우리의 육욕이 일으키거나 혹은 마귀의 간계에 의해서 제시되는 두 가지 시험과 싸워 굴하지 않게 하시기를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우리를 지탱하시며 격려해주시고 그의 힘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셔서 우리의 원수가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불어넣든간에 그 악한 적들의 모든 공격에 대항하여 굳게 서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생기고 일의 결과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더라도, 우리가 그것이 선한 결과로 변할 수 있기를 - 즉, 순경에서 교만하지 않으며 역경에서 낙심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험이 전혀 없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분발하도록 자극을 받으며 시험에 의해서 압력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 활동하지 않아서 태만해질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시험이 오기를 원한 것은 불합리한 일이 아니었고(시26:2 참조), 주께서 날마다 그의 선민을 시험하시는 것도 이유가 없는 일이 아닙니다(창22:1,신8:2,13:3). 이런 때에 주께서는 치욕과 빈곤과 고난과 기타 곤란으로 선민들을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탄의 시험은 서로 다릅니다. 사탄은 사람을 시험하여 멸망시키며 정죄하며 혼란에 빠뜨리며 낙심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연단시키심으로써 그들의 성실을 시험하시며, 실천을 통해서 그들의 힘을 확실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억제하지 않으면 방종에 흐르며 한정 없이 자만하는 육의 세력을 꺾으시며 정화하시며, 달군 쇠로 지지듯이 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사탄은 무장과 준비가 없는 사람을 습격해서 불시에 타도하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험과 동시에 벗어날 길도 마련하시며, 그가 가하시는 모든 것을 그의 백성이 꾸준히 참고 견딜 수 있게 하십니다(고전10:13,벧후2:9).


  “악”이라는 말을 마귀로 해석하느냐 또는 죄로 해석하느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사탄 자신이 우리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원수이며(벧전5:8), 더군다나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죄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기원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시험에도 정복되거나 압도되지 않고, 도리어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적대 세력에 대항해서 주의 힘으로 굳게 설 수 있도록 하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이 기원의 목적은 우리가 주의 돌보심과 보호를 받아 안전한 입장에서 모든 유혹에 굴복함 없이, 도리어 죄와 죽음과 지옥의 문과(마16:28) 마귀의 나라 전체를 견디고 이기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에서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위대한 용사인 마귀와 싸우는 것이나, 그의 힘과 공격을 견디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희롱이 될 것입니다. 이 싸움을 위해서 자신감있게 전투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상대하는 원수가 얼마나 사나우며 무장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미친듯이 날뛰는 사자의 입을 피하는 것같이(벧전5:8) 마귀의 세력에서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임박한 죽음에서 구해내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귀의 날카로운 이와 발톱에 찢기고 그에게 삼키우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가 잠잠하고 있는 사이에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할 것입니(시60:12,시107:14 참조). 능력과 자유 선택의 힘을 가졌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원하는 대로 그것을 믿게 버려 두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힘만을 의지하고 굳세게 서는 것으로 만족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에는 얼른 보기보다 더 깊은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사탄과 싸우는 것이라면, 성령이 충만해서 우리의 약한 육을 완전히 버리기까지는 결코 승리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과 죄에서 해방되기를 기도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새롭게 우리에게 풍부하게 내리고 더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드디어 하나님의 은혜가 완전히 충만해서 모든 악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되리라고 예상합니다.


  야고보의 증거와 같이(약1:13), 우리를 시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반대되는 일이므로, 하나님께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굴복시키는 모든 시험은 원래 우리의 정욕이 그 원인이며(약1:14), 우리의 정욕이 비난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의문은 이미 부분적으로는 해결되었습니다. 또 야고보가 말한 것은 우리는 자신이 죄를 지은 줄을 알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그 죄를 하나님께 전가하는 것은 무익하며 부당하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좋다고 생각되실 때, 우리를 사탄에게 넘겨주시지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배교자의 심리와 추악한 욕망에 빠뜨리시며, 시험에 빠지게 하시는데,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판단은 공정하지만 우리는 알 수 없는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원인을 확실히 아시지만 사람은 모르는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며, 또 하나님께서 배교자의 눈을 어둡게 하시며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셔서 그의 복수의 확실한 증거를 보이시려고 하시는 때가 많은 것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믿게 된다면, 우리는 이 기도가 부적당한 표현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47항. 결론

  특히 우리 자신과 우리의 소유물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이 세 기원은 우리가 전에 말한 점을 분명히 알려 줍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공개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교회 일반의 덕을 세우며 신자 상호간의 교제를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 개인에게 무엇을 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이 함께 양식과 죄의 용서를 얻으며,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해방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담대하게 기원하며 받으리라고 확신해야 할 이유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라틴어 번역에는 없지만, 빼지 않는 것이 여기서는 합당합니다. 즉,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그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6:13).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의 견고하고도 평온한 안식처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신의 가치를 근거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한다면,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중얼거리는 것조차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는 비록 가련하고, 무엇보다도 무가치한 것들이며, 아무 칭찬할 점도 없는 자들이지만, 언제나 기도할 이유가 있으며, 언제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우리 아버지께서 빼앗을 수는 절대로 없기 때문입니다.


  끝에 가서 “아멘” 란 말이 첨가되었습니다(마6:13). 이 말은 하나님께 구한 것을 얻고 싶다는 열의를 표명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이미 실현되었고, 속이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므로 앞으로도 반드시 모두 실현되리라는 우리의 소망이 강화됩니다. 또 이런 소망은 우리가 전에 제시한 기도 형식과 일치합니다.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단9:18-19). 이런 말에 의해서 성도들은 그들이 기도하는 목적을 표명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서 기도를 들어 주실 이유를 구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그런 목적을 얻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며,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확신도 오로지 하나님의 본성에 근거를 두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결론적인 고찰: 주기도의 완전성과 다른 말을 쓰는 자유에 대하여, 48-49항)

48항. 주기도는 지켜야 할 표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과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온통 이 기도 형식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문은 우리의 최대의 교사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를테면 기도의 표준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선생으로 정하시고, 그의 말씀만을 들으라고 하십니다(마17:5).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였으며(사11:2), 사람이 되셔서는 위대한 지혜의 사자로서 사람들에게 보냄을 받으셨습니다(사9:6,28:29,렘32:19의 융합).


  그리고 이 기도는 모든 점에서 완전해서, 이것과 관련을 지을 수 없는 외부적인 것이거나 이질적인 것을 첨가한다는 것은 불경한 짓이며 하나님의 시인을 받을 수 없는 짓입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요약하신 것은 그에게 합당한 것, 그가 기뻐하시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요컨대 그가 기꺼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이 범위를 넘어 다른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원하는 사람들은 첫째로, 자기의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에 무엇을 첨가하려는 것이니, 이런 짓은 광적인 모독에 불과하며, 둘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의 범위 내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면서 자기들의 날뛰는 욕망대로 멀리 빗나가 헤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믿음이 없이 기도하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이런 기도는 모두 신앙과는 관계없이 하는 것이니,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굳게 서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근거로 삼아져야 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보이신 표준을 경시하고 자기의 욕망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힘껏 싸우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터툴리안이 주기도를 “합법적 기도”라고 부른 것은 옳은 말이며 훌륭한 말입니다. 그는 은연중에 모든 다른 기도는 법 밖에 있고, 따라서 금지를 당한다는 뜻을 표시하였습니다.


49항. 우리는 주기도의 용어보다 내용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이 기도의 형식에 구애되어 그것이 일점 일획이라도 변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사용해서 유익을 얻을 다른 기도들이 여기저기 많이 있고, 용어는 많이 다르나, 그 기도들은 같은 성령이 만드신 것입니다. 같은 성령이 신자들에게 암시하시는 기도는 많으나, 그 용어가 주기도와 비슷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가르치는 것은, 이 기도에 요약되어 포함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구하거나 기대하거나 요구해서는 안 되며, 설사 용어는 전혀 다를지라도 뜻이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있는 모든 기도와 경건한 이들이 드리는 기도는 주기도와 관련시켜야 합니다. 참으로, 이 기도같이 완전한 기도는 달리 찾아볼 수 없으며, 더 완전한 것은 더군다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생각해야 할 것과, 사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생각해야 할 것은 이 기도에서 하나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또 그 구조도 지극히 정밀해서, 아무도 개선해보겠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요약하면, 이 기도는 하나님의 지혜가 가르치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을 가르치셨고, 필요한 것을 원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특정 시간에 기도하며, 낙심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데 대하여, 50-52항)

50항. 일정한 시간에 기도함

  우리는 우리의 심령을 높이 들어 하나님을 앙망하며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고 위에서 말했으나, 우리는 연약해서 여러 가지 보조수단으로 지탱하며, 나태해서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으므로, 각각 이기도의 실천을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들을 지정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 시간들이 오면 반드시 기도를 드리며, 그 시간에는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완전히 기도에 바쳐야 합니다. 그런 시간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일과를 시작하기 전, 음식을 먹으려 할 때,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먹고 난 때, 밤에 자려고 할 때입니다.


  그러나 시간들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빚을 갚는 듯이, 그리고 시간 이외에는 갚을 빚이 없다는 듯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규칙적으로 시간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일종의 훈련이며, 따라서 이 연약함은 훈련을 받아야 하고 계속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곤란을 당할 때, 우리는 속히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또 자신이나 타인의 일이 순조로운 것을 보면 반드시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함으로써 그의 손이 도와주신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어떤 특수한 일에 묶어 두려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또한 어느 때에, 어느 장소에서, 어떤 방법으로, 무슨 일을 해달라고 지정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주기도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법을 제정하거나, 어떤 조건을 가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과 방법과 때와 장소 등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결정하시도록 일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리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마6:10). 이런 말로 우리는 우리의 뜻을 하나님 뜻에 복종시키며, 우리의 뜻을 재갈로 제어하듯 함으로 해서 감히 하나님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원을 조정하시며 지도하시도록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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