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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42)_프린트물_2025년 7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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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6-30 18:26

본문

기독교강요강해(142)

[ 제3권 제20장 51항 – 제21장 2항 ]


       성경본문: 로마서 11:5-6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0장 기도: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51항. 기도는 참으면서 계속하라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복종하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섭리의 법칙에 지배되도록 한다면, 우리는 기도를 참고 계속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을 보류하고 주를 기다리면서 참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주께서 나타나시지 않더라도 항상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며, 사람들이 보기에 주께서 무시하는 것 같은 기도들에 대해서도, 결코 들으시지 않은 것이 아님을 적당한 때에 말씀하시리라고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첫 요구에 응하시지 않더라도, 우리가 낙심해서는 안 된다는 한결같은 위로가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열성에 도취되어 하나님께서 그들의 첫 요구를 들으시고 곧 도와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노하시고 적의를 가지셨다고 속단하고서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희망을 일체 버리고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평온한 마음으로 우리의 희망을 뒤로 물려가면서, 성경이 강력히 권장하는 견인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시편에서 보면, 다윗과 기타 신자들은 기도에 거의 지치고, 듣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많은 말로 허공만 치듯 한 때에도, 기도를 그만두지 않습니다(시22:2).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 믿음이 모든 사태를 초월하지 못하면, 그 말씀의 권위가 효력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악한 언행으로 하나님을 괴롭혀 노엽게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과 어떤 조건 하에 계약을 맺는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마치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는 종인 듯이, 자기들이 정한 법으로 하나님을 얽매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즉시 복종하시지 않으면 격노하며 불평을 말하며 항의하며 중얼거리며 하나님께 대해서 미친듯이 날뜁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셔서, 자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는 자비심으로 허락하시지 않는 일을 그들에게는 허락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자손이 이 점을 증명하는데 그들의 기도를 주께서 들어주시지 않은 편이, 고기와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삼키는 것보다 나았을 것입니다(민11:18,33).

52항. 응답이 없는 기도가 있는가

  그러나 오래 기다린 후에도 기도에서 받는 유익을 감각으로 알 수 없거나, 기도의 결과를 지각할 수 없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을 확신하게 만듭니다. 즉, 유익한 것을 얻었다는 확신을 줍니다. 우리가 곤란한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곤란한 우리를 돌보아주시겠다고 자주 또 확실하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빈곤한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시며, 고난 중에 있는 우리를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모든 일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그의 백성의 기대와 인내에 실망을 안겨 주실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대신하실 것입니다. 이는 모든 좋은 일이 그 안에 있고 심판 날에, 즉 그의 나라가 나타나는 때에 그는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허락하실 때에도 반드시 우리가 원한 그대로 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는 듯하면서도,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요한이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5:15)고 한 말의 의미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을 많이 한 것같이 보이지만, 특히 유익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원대로 하시지 않는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친절히 잘 들어 주시며, 그의 말씀을 믿고 가진 소망은 결코 우리에게 실망을 주지 않겠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이 인내심에 의하지 않으면 오래 서 있을 수 없으므로, 이 인내심으로 하여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께서 그 백성에게 가하시는 시험은 가볍지 않으며, 훈련도 쉽지 않습니다. 그들을 극단으로 모는 때가 많으며, 그렇게 몰린 그들이 진창에 빠져 하나님의 다정한 은혜를 맛볼 때까지 거기 오랫동안 있게 하십니다. 그리고 한나가 말한 것같이,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십니다(삼상2:6). 괴로움을 당하고 고독하고 거의 죽게 된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유의하시며 현재의 불행을 끝나게 해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소생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용기를 잃고 절망 상태에 빠지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아무리 이 소망을 고수한다고 하더라도 동시에 잠시도 기도를 쉬지 않는 것입다. 기도는 끊임없이 참고 계속하지 않으면 헛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21장 영원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


(예정의 교리는 중요하므로 무례한 논의나 침묵은 불가하다, 1-4항)

1항. 예정론의 필요성과 그 유익; 호기심의 위험성

  생명의 언약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전해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또는 같은 정도로 환영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다양성에서 하나님의 판단이 경탄하리만큼 깊다는 사실이 나타납니다. 이 다양성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결정에 이바지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값없이 구원이 제공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길이 막히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되는 일임이 분명하다면 즉시 중대하고 곤란한 문제들이 생겨나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선택과 예정에 대해서 바른 길을 따라 생각하는 바를 결정할 때에 비로소 문제가 해결됩니다. 많은 사람이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무수한 일반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구원으로 예정되고 어떤 사람들은 멸망으로 예정된다는 것같이 불합리한 일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릇된 생각으로 스스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는 것은 다음 논의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을 놀라게 하는 그 흑암 속에서 이 교리의 유용성뿐 아니라, 그 심히 향기로운 열매까지도 알려집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알기까지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의 원천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충분히 또 분명하게 확신하지 못할 것입니다. 영원한 선택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소망을 무차별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절하신다는 이 대조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명백하게 드러냅니다.


  이 원칙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켰으며, 진정한 겸손을 얼마나 감소시켰는가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일체 무시하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결정하신 사람들을 선택하시지 않는다면, 꼭 알아야 할 다음의 사실을 알 길이 없다고 바울은 단정합니다.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만일 행위로 된 것이면 은혜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행위되지 못하느니라”(롬11:5-6 참조). 오직 하나님께서 너그러우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선택의 과정을 회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일체 제거하고자 하는 자들은, 드높게 찬양하며 선포해야 할 이 일을 극도의 악의로 희미하게 만들며, 겸손을 송두리째 뽑아버립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백성 중에서 남은 일부분이 구원을 받은 것을 은혜에 의한 선택으로 돌릴 때에 한해서, 하나님이 다만 자기의 원하시는 대로 그 구하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구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며, 또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빚을 지실 수 없으므로 보상을 주시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고 증거합니다.


  문을 닫고 아무도 이 교리를 맛볼 수 없도록 만드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을 꼭 같이 해합니다. 이 교리 이외에는 우리에게 올바른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진지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것과 같이, 우리가 굳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공포심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며, 무수한 위험과 함정과 필사적인 투쟁 속에서도 우리를 승리자가 되게 하시려고 아버지께서 그에게 맡겨 보관하게 하신 것은 모두 안전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요10:28-29). 이런 말씀에서 우리는, 자기가 하나님의 것임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끊임없는 공포심으로 불행할 것이라는 것을 추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한 세 가지 은혜를 모르고, 우리의 구원의 기초가 우리 사이에서 제거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줍니다. 이 점에서 교회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지는데 그것은 베르나르드가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피조물 사이에서 발견되거나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놀랍게도 복된 예정의 품속에 그리고 또 가련한 정죄받은 대중 속에 교회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바르게 가르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일종의 서론으로서 두 가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정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가 이미 다소 곤란한 것인데, 사람의 호기심 때문에 심히 복잡하게 되고 위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호기심은 아무리 억제하려고 해도 금지된 샛길을 방황하며 높은 곳으로 돌입합니다. 그대로 버려두면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찾아내며 해명하려고 합니다. 이런 염치 없는 짓을 하는 사람들이 각처에 있고, 그 중에는 다른 점에서는 나쁘지 않은 사람들도 있으므로 적당한 시기에 그들에게 이 점에 관한 그들의 의무의 한도를 깨우쳐 주어야겠습니다.


  첫째로, 예정을 탐구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의 성역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태연하고 자신만만하게 이 곳에 뛰어들어가는 사람은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며, 미로에 들어가 빠져나올 곳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주께서 깊이 감추어 두기로 정하신 일을 사람이 마음대로 탐색하거나, 가장 숭고한 지혜를 사람이 영원 자체로부터 풀어내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지혜를 이해하기보다는 경외하기를 원하시며, 경외함으로써 찬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나타내시고자 하는 그의 비밀의 뜻은 그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관계되며 유익하리라고 예견하신 범위 내에서 계시하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2항. 예정의 교리는 성경에서만 찾아야 한다

  어거스틴의 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에 들어섰으므로 어디까지나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 길은 임금님의 침실에 이르는 것인데, 거기에는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다. 주께서 그의 위대하고 선택된 제자들에게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에(요16:12), 그 분께서는 조금도 원망을 품으시지 않았다. 우리는 걸음을 계속해서 전진하며 성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아직 깨달을 수 없는 일들을 우리의 마음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저 끝날이 되면, 그 때에는 우리가 지금 알 수 없는 일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주께 대해서 알아도 좋은 모든 일을 탐구할 때에, 주의 말씀만이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우리가 주에 대해서 보아야 할 모든 것을 보려고 할 때에, 우리의 눈을 비추어주는 빛은 주의 말씀뿐입니다. 만일 이 생각이 우리를 지배한다면 우리는 곧 모든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말씀의 한계를 넘는 순간에 바른 길을 벗어나 암흑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과, 거기서 반드시 헤매며 미끌어 넘어지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이 점을 명심해야 하는데, 즉 예정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알려주는 것 이외의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길 없는 황야를 걸어가려는 것이거나(욥12:24 참조) 또는 어두운 데서 무엇을 보려고 하는 것 못지 않게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모르는 점이 있는 것을 우리는 부끄러워 하지 맙시다. 여기에는 일종의 유식한 무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알려고 갈망하는 것이 어리석을 뿐 아니라 위험하고, 심지어 치명적인 일에 대해서는, 우리는 차라리 자진해서 묻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경박한 호기심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 때에는, 우리는 그것에 대항하는 생각으로 억제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즉, 꿀도 너무 많이 먹으면 좋지 않은 것과 같이, 호기심으로 영광을 탐구하는 자는 영광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잠25:27 참조). 이 오만 무례한 행동은 우리를 파멸에 빠뜨릴 뿐이므로, 우리는 당연히 단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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